출생
1960년 1월 4일 (64세)

고향 출생지
광주광역시

학력
광주서림초 - 광주동성중 - 광주제일고 - 영남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멤버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82~1989)

지도자
해태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 (1990~1991)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 (1992~1994)

방수원이 정말 노히트 노런을 했다고
- 2020. 4. 16

원년 타이거즈는 투수가 부족했다. 대신 선수 개개인의 무게감은 상당했다. 영남에 김시진이 있다면 호남은 김용남이 있었다. 광주일고 에이스였던 이상윤도 대단했다. 투타 겸업을 했던 김성한은 타이거즈 첫 10승 투수로 활약했다.


한 명이 더 있다. 조금은 다른 유형이다. 상대를 압도하는 엄청난 구위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선발로 꾸준히 나와 공을 뿌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팀에 꼭 필요한 선수였다. 위장 선발로 나가는 날도 있었고 정식 선발로 던지기도 했다. 중간이나 마무리는 기본이었고 패전 처리 역시 그의 몫이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활용도가 높은 선수, 냉정히 말하면 특출난 것 하나 없었다. 그랬기에 KBO리그 최초 '노히트 노런'이라는 기록을 달성했다는 사실이 더 극적이다. 타이거즈의 마당쇠, 올드팬들은 '혹성탈출'로 기억하는 투수, 바로 방수원이다.

구속 느린 그저 그런 패전투수? 타이거즈 허리 책임졌던 방수원

1960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광주일고에 이어 영남대에서 야구를 했다. 1982년 대학교 3학년 때, 타이거즈가 창단했다. 일고 동기였던 이상윤이 한양대 중퇴를 한 것처럼 방수원도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팀 타이거즈에 입단했답니다.

타이거즈 최초의 선발 투수, 그게 방수원이었다. 첫해에 34경기에 나와 154.1이닝을 던졌고 6승 7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3.85를 찍었다. 2년 차부터는 20승 이상윤이 선발로 확실히 자리를 잡으면서 선발 대신 중간에서 많은 공을 던졌다.

1983년 32경기 94이닝, 1984년 25경기 66이닝, 1985년 10경기 23.1이닝, 1986년 29경기 63이닝, 1987년 23경기 65.2이닝, 1988년 28경기 80이닝, 1989년 16경기 53.1이닝을 남겼다. 통산 197경기에 나와 599.2이닝을 소화했고 18승 29패 18세이브 평균자책점 3.72를 남겼습니다.

재밌는 것은 중간 투수로 그렇게 많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홀드가 단 1개도 없다. 당시에는 홀드라는 기록이 인정을 받지 못했고 KBO리그에서도 2000년 이후에 생겼다. 타이거즈 왕조가 워낙 강했고 투수도 적었기에 원년부터 홀드 기록이 존재했다면 방수원의 존재감도 지금보다는 컸을 것 같다.

이렇다 보니 '땜방용'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래서 방수원은 세이브 같은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기록으로 평가를 해서 연봉을 받는데 홀드라는 개념이 없으니 방수원은 어필을 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그 유명한 '2루 항명 사건'이랍니다.

세이브까지 한 타자가 남았다. 그런데 김응용 감독이 승기를 내줄 것 같은 느낌이 들자 교체하려고 했다. 그렇게 마운드에 올라가 공을 빼앗으려고 하자 방수원은 주춤거리며 저 멀리 2루까지 도망갔다. 김 감독이 계속 따라가면서 공을 달라고 했다. 결국 내주긴 했지만 항명을 했다는 이유로 1군 엔트리에서 빠졌다. 참 야속한 코끼리 감독이었다.

9이닝 102구 아웃카운트 27개, 운과 실력이 모두 맞아떨어진 '노히트 노런'

현시대에서 방수원과 비슷한 유형의 투수를 꼽는다면 누가 있을까. 130km 전후의 평범한 구속, 대신 손목과 손가락을 이리저리 비틀고 그립을 바꿔가며 공을 지저분하게 던지는, 편차가 심한 구속의 공으로 타이밍을 빼앗는 투수, 유희관 정도가 떠오른다. 그전에는 개막전의 사나이 OB 장호연도 비슷한 느낌이랍니다.


탁월한 신체 조건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빠른 구속을 무기로 하는 투수도 아니었다. 에이스라는 칭호 역시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대체 방수원은 어떻게 KBO리그 최초로 '노히트 노런'이라는 기록을 달성한 투수가 됐을까?

1984년 5월 5일 어린이 날로 돌아가보자. 선발이었다. 포수 마스크는 유승안이 쓰고 있었다. 평소처럼 2회까지 던지고 나서 김응용 감독이 내려오라고 할 줄 알았나 보다. 원래 그런 역할로 자주 나갔으니 방수원도 대충 감이 온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했다. 3회에 이어 4회도 나갔답니다.

4회, 첫 타자에 볼넷을 내주고 출루를 허용하자 김응용 감독이 나왔다. 바뀔 것이라 생각하고 체념했는데, 김 감독이 다시 들어갔다. 몸을 푼 투수가 없었나? 그렇게 5회를 넘어 6회까지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슬슬 한계인 듯 싶었다. 그렇게 7회 들어 삼미 선두타자 금광옥에 빠른 안타성 타구를 허용했다.

끝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 타구를 2루수 차영화가 몸을 날려 호수비로 막아냈다. 그리고 8회에는 삼미 우경하의 큼지막한 타구를 좌익수 김종모가 펄쩍 뛰면서 몸을 날려 공을 잡았다. 운이 척척 따라왔다. 그렇게 마운드를 계속 지켰고 경기가 끝났습니다.

9이닝 3볼넷 무안타 6탈삼진 무실점. 30명의 타자를 상대로 102개의 공을 던져 27개의 아웃카운트(내야 땅볼 14개, 내야 뜬공 3개, 외야 뜬공 4개, 삼진 6개)를 깔끔하게 처리했다. 해태는 그날 8-0으로 승리를 거뒀다. 동시에 방수원은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노히트 노런' 대기록을 달성한 선수가 됐다. 피안타와 실점 없이 오롯이 홀로 마운드를 지켜낸 것이다.

이날 승리는 방수원의 1985년 따냈던 유일한 1승이었다. 개인 통산 첫 완봉이자 마지막 완봉을 '노히트 노런'으로 한 것이다. 잘 나가던 슈퍼스타 박철순이나 최동원, 김시진, 이상윤도 아니고 '패전처리' 방수원이 대기록을 세웠으니 팬들은 "혹성탈출 방수원이 노히트노런을 했다고?"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2급 투수의 분전, 간절했기에 가능했던 노히트 노런 대기록

프로야구가 생기고 정확히 599번째 경기에 나온 기록이다. 당시 기사에는 '2급 투수의 분전'이라는 표현을 썼다. 말 그대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선수가 대기록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김응용 감독의 "완봉조차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라는 인터뷰가 실리기도 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방수원은 "8회 2사부터 기록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4회까지 잘 막으면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컨디션이 의외로 좋았고 정면승부를 걸면서 덤빈 것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답니다.

이상윤과 김성한에 가려진 투수였지만 노히트 노런 대기록을 달성했다. 길게 던질 수 있는 투수이자 패전처리 투수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다. 방수원 역시 그 점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을 달성했으니 이제 궤도에 오르나 싶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이후 방수원은 은퇴를 선언한 1989시즌까지 딱 8승을 추가하며 통산 18승을 남기고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가장 유일하고 찬란했던 그 순간, 그때가 바로 노히트 노런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다른 투수도 아니고 130km의 평범한 구속을 가진 방수원이기에 가능한 기록이 아니었을까 싶다. 강투수가 나오면 타자들 역시 긴장하고 더욱 이를 악물고 덤벼든다. 하지만 '설마 방수원에게 안타 하나 못 치겠어'라는 방심이 삼미 선수들 마음 속에 있었고 이는 그대로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름값으로 보면 절대적으로 밀린다. 그럼에도 타이거즈 팬들은 지금까지도 방수원이라는 이름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작고 왜소하고 말랐다. 평범했지만 대신 간절하게 원했다. 그런 방수원에 노히트 노런이라는 대기록이 갔다는 것, 이래서 야구가 참 재밌는 것 같답니다.

Posted by 로라리 :